▒▒ 가슴이 따뜻한 혁명가 조문익 ▒▒
 

텅 빈 들녁에 서서

2006.03.10 12:35

논실 조회 수:893

텅빈들녘에 서서-내 아우 고 조문익 열사를 추모하며-/조창익  
글쓴이 조창익   2006-02-21 02:06:03, 조회 : 12


                                            텅 빈 들녘에 서서

-가슴이 터지도록 불러 보고픈 자랑스러운 내 아우, 고 조문익 열사를 추모하며-

                                                                               조  창  익 (친형/전교조 목포지회장)


겨울, 五山平野

언 땅으로 있으면 세상 더러운 꼴
안 볼까봐
까마귀만 벗 삼은 오산평야
가끔 짚 벼눌 허물어지고
전군가도(全群街道) 택시소리 요란해
속살이 애려도
속만은 주지 않어야
강건한 원한으로 버티어야
진달래꽃 황홀하게 흩뿌려질 시절이 빨리 온다고
빨리 온다고 빈 가슴 꼬옥
보듬는다

사람들은 정오녘 뜨뜻한 햇볕아래 나와
녹은 땅을 보고 좋아하지만
오산평야는 더 크게 속으로 웃는다. 그까짓.

봄이 오기 전엔
눈물마저 얼리고 있으리라.(1984, 조문익)


기억나느냐? 문익아! 네가 군부독재 치하에서 고려대 철학과를 중퇴당하고 천하를 주유하던 어느 날에 일곱 친구들과 함께「코뚜레와 울보들」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내놓은 첫 시집 속에 담긴 너의 작품이다. 사실 오산평야는 한 맺힌 벌판이지. 참으로 옹색한 부전자전이었다. 할아버지의 중지(中指)처럼 아버지의 환지(環指)와 소지(小指)가 경운기 피댓줄에 감겨 피범벅이 되던 날, 살점이 덜렁대던 아비의 손을 부여잡고 이리(익산) 시내 한 외과병원에서 눈물범벅으로 수술을 했었지. 결국 아버지 손가락을 쇠톱으로 절단하는 자리에 우린 우두커니 서 있어야만 했고.

그렇다. 들녘에 나서면 눈물이 난다. 우리는 가난한 농군의 자식들이었지. 일찌기 들녘의 철학을 체득하고 있었다. 모내기철 너는 왼손으로 나는 오른 손으로 철사 줄을 나란히 마주잡고 납작 엎드린 자세로 논바닥에 깊숙이 뿌리박은 모판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곤 했다. 죽이 잘 맞았어. 이렇게 떼어낸 어린 모판을 이앙기까지 비닐포대로 실어 나르느라 얼마나 낑낑대었던지.

뙤약볕 아래에서 게딱지처럼 들러붙어 농약 주는 날이면 우린 농약줄을 어깨에 들쳐 메고 고랑 속으로 파고들었다. 논바닥에 물이라도 방방한 날이면 오른 쪽 발목에 농약줄을 감고 비교적 쉽게 농약을 줄 수 있었지. 물이 말라버려 논바닥이 뻑뻑한 날이면 어찌도 그놈의 농약줄이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던지. 으득으득 이빨 갈며 뿌려대는 농약의 포말 속에 녹색 오산평야는 어찌 그리도 눈부시게 푸르기만 하던지. 농약주고 돌아오는 들길에서 우린 함께 휘파람을 불곤 했었다. 그때부터 벌써 네 휘파람 소리는 일품이었어. 명징한 휘파람 소리가 붉은 노을을 머금은 지평선 너머로 시원하게 울려 퍼지던 그 순간들이 환청으로 되살아온다. 지금, 이 자리에. 참 그립구나. 네 손을 잡고 한번만 더 그 들녘을 걸어보고 싶다. 그 들판에서 너는 진달래 황홀하게 흩뿌려질 시절을 꿈꾸었었구나. 스무 살, 그 아픈 청춘에, 아름다운 혁명을 꿈꾸었구나. 문익아,

어린 나는 집안의 훌륭한 어른들이 과거 시험보러 갔다가 뇌물 운운하는 소리듣고 짐싸들고 낙향해버렸다는 강변(?)에 코웃음 치곤했다. 뇌물을 주어서라도 후손들을 잘 먹여살려야지!하는 생각도 있었던게지. 당시 궁핍에 대한 반발이었겠지. 몰락양반의 후예로서 물려받은 것 하나 없는 적수공권의 할아버지는 지리산 참나무 숯을 구워 구례 장터에 팔아 송아지를 사고 손바닥만한 논배미를 사들이고 한뼘한뼘 늘려 나가셨지.

여순사건과 6.25의 와중에서 지리산을 휘감아도는 비극의 역사는 연좌제다 뭐다해서 우리 집안에도 예외 없이 불어 닥쳤지. 할아버지는 천신만고 끝에 모든 걸 앗기고 목숨만 건져 곡성으로 되돌아오셨고. 섬진강변에서 날마다 타오르는 시체 연기에 코를 막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던 아버지에 대한 어른들의 생존전략은 새로운 세상에 대한 시야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똑똑하면 다 죽으니까. 위정척사의 깃발 휘날리며 끝내 양왜를 거부하고 신식학문도 거부하신 증조 할아버지의 서당에서 너도 나도 한문을 공부했었다.

은행나무 똥냄새 가득하던 그 서당에서 동네 청년들과 참새 잡던 너와 나의 어린 시절, 면암 최익현 선생을 모시던 오곡 서당, 지금은 무슨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더라만. 순천 신학문 집안인 어머니의 혁명에 의해 나는 6년을 숨어서 국민학교를 다녔고 너 또한  1학년 동안을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다녔었다. 그리고 증조부께서 아흔 살이 훨씬 넘어 드디어(?) 돌아가셨다. 그 후로 우리는 이제 정문으로도 후문으로도 학교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지.

문익아, 너는 ‘신동’(?)이었어. 키가 작아 ‘딴또’라고도 불리웠지. 골목에서 네 머리를 따라잡을 자는 아무도 없었다. 옆집 후선이가 ‘이찌, 니, 산, 시-’를 배워가지고 일본말로 하나둘을 셀 때도 너는 꿀리지 않고 금방 따라해 버리고 서당에서 배운 한자를 가지고 기를 죽이곤 했지. 고전읽기 대회에 나가면 상이란 상을 다 타왔었다. 주판알도 잘 튕겨서 계산이 빨랐고, 무협지 이야기를 참 재미나게 잘했어. 무엇보다도 글쓰기를 잘했어. 지금은 조금 우습지만 ‘새마을 운동’을 주제로 한 대회에서 너는 큰상을 받았지 아마. 중학교 때도, 고교 시절에도 네 글 솜씨는 뛰어나서 상을 많이 타왔어. 난 속으로 무척 부러웠고 누구에게나 자랑하곤 했다.

섬진강은 우리의 놀이터였다. 강가 원두막 생각나니? 수박을 따다가 수 미터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길 위에서 강물 위에다 터-엉 던져놓고 냅다 내려가서 터진 수박 집어먹던 기억이 새롭구나. 한번은 너 혼자서 지키고 있는 어두운 원두막에 내가 너무 늦게 도착해 무서워 떨고 있는 네 모습도 생각난다. 새벽마다 오이랑 참외랑 수박 등속을 싣고 리어카로 읍에다 내다팔던 때 내가 앞에서 끌고 넌 엄마랑 뒤에서 밀고 그랬지. 곡성을 거쳐 순천에서의 짧은 생활. 인제동 대밭에서 총싸움하던 때, 보리밭, 만화책 등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을 거야. 할아버지의 결정으로 올라온 전북 오산(五山,) 본디는 자라등 모양처럼 봉긋하게 올라왔다 해서 자라오(鰲)자 오산에서 타잔놀이, 활쏘기가 네 생활의 중요한 일부였지. 옆 동네 대기, 병권이랑 넌 참 재미나게 지냈다.

중학교 1학년 때 문익아, 너 참 고생 많았어. 형은 그 때 고3 특수반이라 해서 학교기숙사에 머물렀고 네가 하루 세끼 밥을 도시락으로 다 들어 날랐어. 지금 생각해보면 키 작은 네가 얼마나 고생했을까 싶어 안쓰럽기 그지 없단다. 사랑하는 아우야. 판화를 잘 새겨서 ‘이리시장상’을 탔던 때가 생각난다. 형 대학 시절이었는데 네 판화로 연말에 친구들 수십 명한테 일일이 찍어서 보냈던 기억이 있다. 너의 판화를 자랑삼고자 했던 나의 축제였단다. 내 자랑스런 아우의 작품임을 너희가 알아달라는 객쩍은 시위였지.

어렸지만 넌 이미 야들야들한 ‘죽순’에서 따글따글한 ‘대나무’로 성장해있었다는 확신이 내게 있었지. 내 명령(?)을 거역하는 널 쫓아 논둑길을 몇 바퀴씩이나 돌고 너를 잡지 못해 씩씩대면서도 줏대있고 올곧은 널 외경심으로 바라보곤 했단다. 나는 내 동생들을 절도있고 건강한 아우들로 만들기 위해 새벽 5시면 모두 기상시켜 졸린 눈으로 오산초등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리곤 했지. 오가는 길에서는 군대식으로 번호를 붙여야만했던 너희들의 형에 대한 눈물겨운 굴종과 반발심과 증오는 뒤범벅되어 우리들의 성장 소설이 되어갔다. 당시 너의 일기에는 온통 형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차 있었지. 화장실에서 버려진 너의 일기장을 읽곤 했는데 어떨 때는 참 미안하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교에서 배운 교련을 흉내 내고 있었던 게야. 이 형이 군사훈련교관이었다. 견고한 유신 체제하에서 말이다.

문익아! 1980년대 타는 목마름으로 너는 서울을 만났다. 재수시절, 고척동 이모 집에서 대일학원을 오가며 1983년 고려대에 입학했지. ‘현대철학회’ 등의 써클에 가입했고 각 종 시위에 참여하게 되면서 경찰서를 드나들게 되었고 종내 넌 제적이 되었다. 온 집안이 난리가 났지. 집안의 희망 동이인 너의 제적 사건은 커다란 충격이었어. 그 뒤로도 경찰서에서 혹은 면사무소에서 전화가 오는 날이면 우리 집은 사회과학 서적을 가마니에다 넣어가지고 동네 다른 집으로 옮기느라고 야단이 났다. 부모님들은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고.

하지만 80년대 중반 역사적 격랑기에 난 당시 군복무를 마치고 교사로 복직한 후 많지 않은 내 월급의 일부를 기꺼이 너를 위한 불온서적(?)을 사는데 투자하고 싶어 했다. 너에 대한 신뢰와 외경심 때문에. 너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싶어 했고 한군데 머무는 것을 두려워했다.

역사, 철학, 문학, 과학, 종교… 어느 한 영역에 고정되는 법 없이 부단한 항해를 서둘렀었다. 어느 날 정치경제학을 공부하고 있다며 이제는 ‘금융’을 조금 알겠노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언젠가는 노자의 도덕경을 번역해가지고 와서 이런 번역은 아마 내가 처음일거라고 득의만만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다가 이내 이를 극복하고 비판하는 태도를 보였다. 무림, 학림을 이야기하면서 그 복잡한 논쟁의 역사를 설파하는 네 눈은 항상 반짝거렸다. 최근 논실 마을의 공동체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 때마다 난 그저 고개만 끄덕였고 다음 광경을 기다리곤 했었지. 난 너의 충실한 수제자였어. 너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나면 안개처럼 뿌연 세상이 맑게 보이고 생의 에너지를 충전하곤 했단다. 이는 나만의 느낌만은 아니라는 게 여러 사람의 증언을 통해 확인하게 되니 참 자랑스럽다. 내 동생이.

문익아, 나는 너의 변화의 궤적을 따라잡기에 바빴다. 사실 네 학문과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에는 난 너무 게을렀다. 그래서 1989년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된 이후에도 너를 만나 공부하고 싶다고 하니 여건이 안 된다며 너보다 먼저 간 희철이를 소개해주었지. 희철이와 난 얼굴도 모르는 빛고을 광주 어느 노동자의 자취방에서 일주일에 한번 씩 만나 소위 학습을 하곤 했다.

변혁에 대한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영역에 대한 나의 도전이었다. 당시 난 무안에서 상근을 하고 있었는데 동지들에게는 광주에 볼일 있다며 그저 화요일 오후를 비워달라고만 했었지. 아마 이일을 아는 사람은 너 밖에 없을 거야. 너를 대하듯 희철이를 만나는 비밀회동이 반년은 족히 넘었겠지. 그러던 어느 날 희철이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청천 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져왔고…. 이젠 문익이 니가 열사가 되어 하늘에서 희철이를 만나고 있겠구나. 너희 둘 다 내 삶의 스승이다.  

문익아, 너를 보내고 열흘 가까이 흘렀다. 주변 좋은 분들이 온갖 탐착을 극복하고 해탈해야 온전한 열반이라고 말씀하시더라. 난 아직 이 말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만 평화와 평등의 새로운 세상을 향한 혁명적 열정으로 가득한 네 삶이 억겁의 윤회 속에서 다시 온전히 부활해야 한다는 강한 열망이 배어있다고 생각한다.

문익아, 내가 보기에 너는 이미 부활했어. 사람들 가슴마다에 유의미한 족적으로 승화하고 있어. 얼마 전 여의도 사립학교법재개정 저지투쟁 현장에서 차상철 동지를 만났는데 전북노동포럼도 예정대로 진행하신다고 하더라. 노동운동의 근본적 성찰과 부단한 탐색을 희구했지 않았느냐. 마지막 작업이었는데 포럼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하늘에서나마 힘을 보태주기 바란다. 또한 지금의 민주노총이 민주주의의 절대적 위기 속에서 슬기롭게 탈출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아주기 바란다. 네가 지난 해 2월 17일 이수호 위원장에게 보냈던 편지 기억하느냐? 사회적 합의주의를 용기있게 비판했던 서한에 담긴 진정성과 논리정연함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감동하고 동의했지. 노동 운동 진영에 잔잔한 파장이 일었다. 지금의 민주노총의 위기에 대하여도 무언가 할 말이 많을 듯하구나.  

문익아, 아직은 울어도 서럽고 웃어도 서럽다. 익산 영모묘원에서 이제 더 이상 눈물을 흘리지 않을 터이니 서운해 하지 말라고 네게 말했다만 엊그제는 아침밥을 먹다가 왈칵 눈물이 쏟아져 형수가 나를 달래느라고 애썼다. 앞으로도 장담을 못하겠다. 너를 보고 싶을 때엔 언제든 내 책상에 놓인 네 웃는 얼굴을 보고 또 우리가 찍어놓은 네 강연모습을 재생시키겠다. 한국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 생각나니? 땅끝 해남 교육청에서 네가 행한 강연인데 화질도 좋고 네 목소리도 참 낭랑하니 좋다. 너는 영원히 살아있는 모습으로 날마다 달마다 부활할거야.

문익아, 용화와 용창이가 이 곳 목포에 와서 며칠을 묵고 올라갔다. 두 녀석이 나란히 침대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너와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되더라. 이젠 나란히 누운 동생을 보듯 옆도 좀 보고 갈란다. 너 가고 나니 남은 가족이 더욱 소중해지는구나. 이것도 네가 남긴 아름다운 유산이다만. 앞만 보고 달리는 우리가 가족 카페 ‘산들강’을 만들어 서로에게 좀 더 다가서자고 해놓고 겨우 몇 번 들락날락 하던 차에 네가 떠나버렸구나. 너 없는 ‘산들강’! 빈 공간이 너무도 커 잘 키워갈 자신이 없다만 그래도 노력할 터이니 너도 가끔 와서 살펴 보거라.
문익아, 카페에서 너의 별칭을 ‘저녁노을’이라고 했다. 저 텅 빈 들녘 붉게 물들여 새벽을 앞당기고 싶었느냐? 고단한 몸 뉘어 안식을 찾고자 했느냐? 홀연히 떠난 너를 찾아 어디로 나설거나.

2006년 2월 21일 새벽 2시  형 창익 쓰다

eduplaz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