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한 혁명가 조문익 ▒▒
 
2010.02.27.토.안개

조부 기일

문익아! 할아버지 기일이야. 대보름 전날 돌아 가셨었다. 할머니랑 함께 모시기로 했어. 올해부터는 여기 목포에서 모시기로 했어. 아버지, 어머니 모두 내려오셨다. 제상을 차리고 기제 순서에 맞추어 종손인 용진이가 집사일을 거들었단다. 분향강신-참신-초헌에 이어 독축도 종손이 했어. 생애 첫 독축이었지. 컴퓨터로 '유세차…상향'을 한문과 한글로 종서해서 읽기편하게 편집해서 건넸다. 읽어가는 도중 운이 맞지 않으면 아버지께서 수정해주시고 몇 번 거듭하면서 독축을 완성했지. 사실 한글 독축문을 내가 준비했는데 아직 그렇게 하지는 못했어. 새로운 예법으로 하려면 아버님과 상의해야 하는데 천천히 해보기로 했다. 나는 할아버지께 한편의 편지를 써서 읽어올리고 기억에 없는 손주들은 자신의 생활을 담은 글을 올리는게지. 그리고 글이 준비되지 않았으면 생각나는대로 말을 하는거지. 망자와의 대화를 진행하는게지. 편안하게. 제상을 앞에두고 아마 쉽게 접근하지는 못하겠지만 시도해보기로 했다. 마치 문익이 너 보내고 축문없이 우리가 너에게 이야기하면서 제를 올렸던 것처럼. 아버님께서 받으들이실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반가와 하셨을까? 살아 생전 얼굴을 보지도 못한 증손자의 술잔을 받으시고 흡족해하셨을 할아버지, 당신께서 애지중지 키우셨던 증손자를 품에 안고 싶어 하셨을 우리 할머니. 사진 속 두 분께서 나란히 웃고 계셨다. 농투성이 할아버지의 거친 손길이 느껴지고, 할머니의 그윽한 미소가 눈물겨웠다. 할머니 하신 말씀, '창익아, 너는 다해도 늙지는 마라!' 명언이셨지. 할아버지를 일흔 한 살에 보내시고 아흔 한 살까지 20년을 홀로 지내셨던 우리 할머니. 손주, 증손주들 생겨날 때마다 환호하셨던 할머니, 할아버지 살아계셨으면 좋았을 터인데 하시면서 늘 아쉬워하셨지. 작은 아버지도 함께 모셨다. 본디 네가 모셔왔었는데 너 없으니 이제 내가 모시기로 했다. 아버지께서는 단명하신 작은 아버지의 재능을 아까와 하셨다. 어쩌면 부자가 아우를 잃은 슬픔도 공유하고 있던 자리.

할아버지, 할머니, 작은 아버지 자리에 너도 함께 내려와있으려니 하면서 우리는 웃으면서 진행하려 애썼다. 아헌-종헌-계반-삽시-첨작-합문-개문-헌다-철시복반-사신-철상을 거쳐 음복하기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함께 축제이려 애썼다. 손자의 독축 이후 잠깐동안 호곡하였던 부모님까지도 오늘 한결 가벼워진 마음을 보이셨다. 밤새 음복하고 담소하면서 새벽을 맞이하였다. 다들 힘든 세상이지만 망자를 다 모셔놓고 하룻밤 꿈을 나누었으니 이 또한 행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너도 잘 있지? 할아버지, 할머니 잘 계시지?

-오전에는 아버님과 고이도를 다녀왔다. 비료 열 포대를 싣고 가서 감나무마다 듬뿍 듬뿍 깔아주었다. 아버지는 감나무 껍질 벗기는 도구를 구해가지고 오셔서 껍질 벗기는 작업을 하셨다. 나는 어머니께서 주신 사철나무 두 그루를 마당 한쪽에 심었다. 오가는 길, 압해-운남 간 운남대교 공사 현장을 견학하고 무안 공항에 들러 커피 한잔도 마셨다. 아버지랑 햇살 아래에서 함께 걷고 숨쉬는 것이 참 커다란 행복임을 느끼곤 했다. 사실 할아버지께선 지금 아버지 나이에 세상을 뜨셨기 때문에 아버님과 함께 하는 순간 순간이 그렇게 고귀할 수가 없다. 가까이서 모시고 이 곳 저 곳 세상 구경 함께 하는 아들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