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에게 (10.01.05)-전교조 시무식 그리고 지리산 이야기(1)2010.01.06 07:42 2010.01.05. 눈 전교조 시무식 그리고 지리산 이야기(1) -오전 11시, 전교조 전남지부 시무식이 열렸다. 갑자기 바람이 불고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홍성봉 지부장을 비롯한 상근동지들, 사립지회 동지들이 주로 참석하였다. 공립중등과 초등 동지들은 많이 보이질 않았다. 지역시민사회단체 동지들이 합석했다. 지부장의 여는 말과 조창익, 윤소하, 김현우 동지들의 연초덕담 한마디씩 주어졌다. 떡시루가 준비되어 새해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떡자르기 순서도 있었고 인근 식당으로 옮겨 떡국을 한 그릇씩 나누는 시간도 가졌다. 폭설로 인하여 본래 참석하기로 했던 동지들이 불참하여 예상보다 수가 적었다. 떡국을 서른 그릇 남짓 주문했는데 실제로는 스무 그릇쯤 소화했다고 한다. 김주희 총무가 나누어주는 복떡 몇 조각을 들고 모친께 갖다 드렸다. 아직도 따스했다. -종일토록 눈이 내렸다 그쳤다를 반복했다. 신문은 '눈감옥에 갇힌 세상'이라고도 하고 '하얗게 질린 도시'라고도 표현했다. 폭설로 사방 팔방이 난리다. 무방비상태에서 눈 무게를 못이겨 무너져 내린 비닐하우스, 수천마리가 압사당한 양계장, 크고 작은 교통사고들. 폭설이건 폭우건 서민들의 삶이 고통스럽다. 이 눈길을 뚫고 아버님께서 도착하셨다. 광주 인근 큰 길은 다행히도 얼지 않아서 버스로 오시는데 큰 어려움이 없으셨단다. -아버님이 오신다하니 모친께서는 꼬막에다 굴에다 시장을 봐오셨다. 싱싱한 굴에 연말에 아끼는 후배로부터 선물 받은 복분자 한 두 잔을 곁들이면서 저녁시간을 맞이했다. 어머니도 좋아하시고 그동안 혼자서 밥해드시느라 바쁘셨던 아버님께서도 좋아하셨다. 두 분이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계시니 더없이 행복하다. 우리는 또 지리산 시절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운다. 수 백 번은 들었을 법한 살아온 이야기는 해도 해도 질리질 않는다. 삶이란 그런 것이다. 아홉 살 때부터 지게를 지고 세상을 헤쳐 나오신 아버님은 회한이 많으시다. -39년생. 실제론 38년생으로 45년 해방, 아홉 살쯤에 48년 여순사건의 한 복판을 지나오셨다. 지금의 지리산 문수사 터는 아버님의 유년 시절의 기억이 그대로 담긴 생가 터였다. 지금 문수사 본사터엔 큰 집이 있었고 그 아래로 사랑채가 있고 그곳에는 농업노동자, 즉, 집안 머슴들이 함께 살았다. 48년 여순 24연대와 25연대의 전투의 와중에 어린 아버님은 계셨다. 문수사 집에는 낮에는 국방군이 밤에는 파르티잔(빨치산) 부대가 자고 갔다. 문수사 계곡은 양쪽으로 높은 산봉우리를 끼고 있는데 파르티잔 부대는 봉우리에서 25연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몰살시킨 사례도 있다. 치열했던 격전지, 문수사에서 결국 소개되어 내려오기까지의 기억들이 쏟아져나온다. 감자 120가마 정도가 일년 농사였다. 인근 동네에서는 그 정도 수확이면 부자로 통했다. 화전으로 일군 땅에서 낸 소출이다. 순전히 노동의 산물이라고 봐야 한다. 아랫마을에서는 쌀을 가지고 와서 감자와 교환해갔다. 감자 1가마와 쌀 반 가마정도가 교환가치였다. 감자의 가치가 괜찮은 편이다. 저수지 아래에 땅도 몇 뼘 있었고 숯도 굽고 별 일을 다해 생계를 유지했던 곤궁했던 시절, 그래도 집안에 머슴을 두었다하니 이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농업노동자들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4.3 제주 항쟁에 이어 48년 말, 여순사건이 말미에 접어들 즈음, 진압군은 지리산 마을들을 불에 태우며 저항군들의 근거지를 말소시켜갔다. 문수사 집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집안 세간라고 할 것도 없지만 다 포기하고 국방군들의 총칼 앞에서 이불 몇 가지만 지고 나오는 길, 아홉 살 꼬마도 꼬마 지게에 몇 가지를 얹어 지고 내려왔다. 몇 걸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문수사 집은 불에 태워졌다. 불에 타고 있는 연기를 바라보며 내려온 지리산 시절, 아홉 살 꼬마의 뇌리에는 섬진강 다리 밑에 즐비하게 쌓인 시체하며 그들이 태워지는 시커먼 연기하며 한국현대사의 끔찍한 장면들이 가득하다. 꼬마 지게꾼이 안쓰러웠던지 한 군인은 자신이 지고 있던 총을 옆 동료에게 건네고 꼬마의 지게를 대신 져주곤 했다. 꼬마의 기억에 남은 고마운 장면이다. 한국현대사의 질곡 속에서 낮에는 국방군에 밤에는 파르티잔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던 민초들의 선택은 끝내 부역자로 몰려 고초를 겪었으며 우리 집안에서도 그런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고 한다. 어머님 이야기도 끝이 없는데 순천이 고향인 어머님의 똑똑했던 둘째 오빠도 좌익으로 몰려 마을 뒷산 현장에서 화염방사기로 처형당했다. 지리산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할머니의 아버지, 항일의병장 습재 할아버지(면암 최익현의 수제자)의 일화 하나. 가솔들이 공들여 번듯한 옷을 해드리면 바깥 세상에 나가 거지한테 벗어주고 자신은 거지 옷을 입고 들어오셨다는 것. 가솔들은 원망스럽기 짝이 없고 한 두번도 아니고 번번히 그러하니 참으로 난감하더라. 자신은 그렇다 치고 가솔들은 항상 힘들었던 것, 그나마 항일투쟁에 집 팔고 논 팔아 다 바쳤으니 남은 가족들은 무엇으로 살아갈꼬. 의협을 앞세운 이들의 배후에는 가솔들의 팍팍한 한숨소리가 항상 따라다녔다는 것. 지금도 소위 운동한다는 가족들의 한숨소리 원망소리의 근저는 아마도 같을 것. 뻑하면 감옥가고 뻑하면 해고되는 자리에 함께 한다는 것,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형벌이지. 스스로 해방되지 않으면 안되는 길에 서 있는 것이지. 댓글 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