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한 혁명가 조문익 ▒▒
 

아우에게 (09.12.06) - 겨울, 고향 기행

2009.12.07 03:02

조창익 조회 수:516



2009.12.06.일.바람.

고향기행

문익아! 오늘 집에 다녀왔다. 부모님 다 잘 계시더라. 어머님 건강도 많이 좋아지셔서 김장김치를 스스로 담그셨단다. 배추가 수 백포기는 족히 될 듯 한데 마당에 쌓아두고 며칠에 걸쳐 김장을 하시겠다는구나. 여기저기 챙겨야 할 식구 친지들이 많아서. 너도 먹어봐서 알겠지만 고랭지여서 그런지 배추 섬유질이 오래토록 탱글탱글하고 사글 사글한게 그만이야. 어머니 손맛이 또 그만이지.

어머니께서 차려 주신 밥상, 새 김장김치로 뚝딱 한 그릇 해치웠지. 굴도 듬뿍 넣으시고 깨에 푹 담그셔서 아들 입에다 넣어 주시기도 하고. 누룽지도 한 그릇 가득 내놓으시니 또 비우고. 그러고 나니 이번에는 숭늉 한 컵을 가득 채워 내놓으시는 것 아니겠니. 배가 터지는데 어머님 손길을 거절하지 못해 먹고 마시고 먹고 마시고.

뒤뜰에 서서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었다. 작년에 심은 옻나무가 키가 육척 칠척은 족히 넘어설 정도로 잘 자란다는 이야기. 속이 냉한 사람 온기로 북돋우는데 옻닭으로 구환하면 좋다는 이야기, 요즘 구지뽕나무 뿌리가 몸에 좋다며 사방에서 구한다는 이야기, 잔가지 치기 안한 감나무 그늘이 한봉 농사에 좋다는 이야기, 한봉 수확은 따뜻하면 녹아내리니까 겨울에 따야 한다는 이야기, 판매처만 있으면 한봉 농사가 쌀농사보다 몇 배는 낫다는 이야기, 쓰러져가는 사랑채 툇마루를 고물상 수집가들이 와서 10만원에 팔으라 했다는 이야기, 15년도 넘은 캘로퍼 차를 이번에 200만원도 넘게 돈을 들여 다시 고치셨다는 이야기,

대잎 부딪는 소리가 향기롭게 퍼지는 오후녘, 골짜기 너머 편백나무 숲을 건너다보며 부자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도란도란 산골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햇살에 투명해진 우리 아버지 얼굴을  살펴보니 잔주름하나 없이 참 곱게 늙으셨다. 피부색도 젊은 아들보다 더 좋으시고.

바람이 잦아들었다며 김장배추 덮어놓은 거적대기를 걷어내시는 아버지. 내일은 집안 유사가 있으니 떠나야 하므로 오늘 배추 배를 갈라놓으시겠단다. 경운기 피댓줄에 감겨 잘려나간 두 손가락. 나머지 세 손가락으로만 헌장갑을 끼고 계셔 칼질을 할 때마다 두 개는 출렁출렁 가난하게 따라다니기만 하는데 그래도 우리 아버지, 농삿일에 70여 성상 마주했으니 으레 능숙한 칼 솜씨이시다. 아버지 손가락만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오는 나는 저번 신안 염전에서 사온 소금을 한가마니를 가지고 나와서 용기에 부어놓았다. 어머니는 금방 간물을 맞추시는 사이 나는 한 가마를 더 세워놓았다.

햇살이 흐릿해지자 부모님께서는 빨리 가라며 등을 떠미신다. 어두워지면 운전하기 조심스럽다고. 산속 겨울 해는 참 짧구나.

섬진강은 들러보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다만 보고 왔다. 대신 온전히 빛바랜 산골짜기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심호흡하곤 했어. 여여한 산빛에 감사했어. 춘생(春生) 추살(秋殺)- . 사방 수목들이 천지조화에 순응하며 장엄한 교향악을 뿜어내고 있었지. 마른 풀잎은 한 삶을 여유로이 마감한 생물체로서 대지에 다시 돌아가 봄을 기다리기로 한 듯 싸한 겨울바람에 누워 잠들어 있고, 나목들은 호곡하는 산곡풍의 휘파람 소리에 먹먹한 가슴으로 훵덩그레 서 있었다. 속울음 삼키며 떠난 임이라도 기다리 듯.

내려오는 길, 명산 저수지에 차를 내고 잠시 내렸어. 언덕길을 걸었다. 담배도 한 대 꺼내 물고 연기도 뿜어내면서. 우리 어렸을 적 초등학교 소풍 때면 단골로 왔던 곳. 보물찾기, 노래자랑, 미끄럼타기, 말뚝박기, 고등학교 때는 초등 동창생 모임을 여기에서 했었고. 이름도 얼굴도 가물가물한 남녀친구들. 저수지는 유년 시절의 발자취를 그대로 복기시켜주는 곳이지.

문익아! 고향 산하는 다 잘 있더라. 유년의 기억까지도. 너는 시간이 많지? 조금 편해졌을까? 날마다 보는 네 얼굴, 오늘 어머니 화장대에서 또 보았어. 너 대학 졸업식 때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너하고 나하고만 찍은 사진도 있었고. 보고 싶었다. 네 그 손 한번 잡아보고 싶었어.

산골을 벗어나니 서녘햇살이 아직 팽팽하게 살아있더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6천원 주고 산 7080 노래 들으며 괜히 서러운 마음에 눈물도 삐질삐질 흘리다가 광주에 들러 주탁이를 만났다. 배추 한 포기랑 산속에서 낳은 계란 몇 알을 건네며 딸 지혜 먹이라고. 그가 사온 두유 한 병을 마시며 잠깐 동안 차안에서 담소를 즐기고. 너를 보듯 살가운 그를 만나고 다시 다도해 속으로 미끄러지듯 돌아왔다. 오늘 풍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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