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한 혁명가 조문익 ▒▒
 

조문익님을 보내던 날/양승호

2006.03.10 12:41

광장 조회 수:922

조문익님을 보내던 날  
글쓴이 양승호   2006-02-22 12:55:54, 조회 : 32


논실 학교 뒤에는 대 숲이 있다.
쏴아아  대 숲 소리가 가슴을 훑고 지난다.

  삶과 죽음은 순간의 엇갈림이다. 하지만 떠나버린 이에 대한 남은 이의 통곡과 애절함 그리고 작별의 인사와 새로운 다짐으로 이어졌던 조문익님의 영결식은 남은 이들에게 순간을 영원으로 건너게 하는 통로였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몇몇 사람은 그 영결식장이 너무도 가슴 벅찬 감동의 시간이었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 추운 날씨에 실내도 아닌 야외에서 치루어진 영결식에서는 중간에 자리를 이동하거나 움직이는 이가 거의 없었다. 영결식을 마치고 나서야 나도 온 몸이 꽁꽁 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민주노총 사무실 앞에서 치루기 로 한 노제를 시간관계상 생략하고 효자동 화장터 이화원으로 옮겼다. 이제 남은 일정은 이화원에서 오후 1시에 출발해서 3시경에 장수 논실 학교에 들렀다가 익산 영묘원 에 안치되는 것이다. 이화원에서 나는 곧 바로 장수 군청으로 자리를 이동해야 했다. 장례식장으로 조문 온 이주 여성들이 조문익님 가는 길을 보고 싶다기에 장수 군청에 모여 있으면 그들을 데리고 논실 학교에 가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자리를 빌려 내심을 말한다면 나는 혼자서 논실 학교에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낯선 공간에서 그의 죽음을 들어서 아는 것과는 달리 그와 늘 함께 했던 논실 학교나 장수 들샘 교실에서 실제 내 눈으로 그의 부재를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나는 장수와 논실을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그가 떠났다고는 해도 조문익님은 장수나 논실에 여전히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시간을 내서 가기만 하면 다시금 환하게 웃으며 반겨주리라 믿고 싶었다. 어린애 떼쓰듯 그렇게 땡강 부리고 싶다. 그런데 그런 나더러 이주여성들은 장수에 모여 있을테니 논실에 좀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 여성들을 바라보노라니 이들과 함께 이 현실을 직시해야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라면 나의 어처구니없는 어린냥을 받아줄 것이다. 과연 몇 명이나 올까 하면서도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서 승용차 두 대와 트럭 그리고 봉고까지 해서 넉 대 정도 군청 앞에 세웠는데, 글쎄 이주 여성 23명 정도에 아이들은 물론이고 남편들도 네다섯 명 정도가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장수는 여전히 눈이 녹지 않았고 길은 미끄러워서 다니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아이들까지 데리고 교통편이 그토록 열악한 곳에서 어떻게들 왔을까?

  나는 우리가 늘 공부하던 군청 옆 들샘 교실에 잠시 들렀다. 이주 여성들이 모두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우리가 개강하던 날 찍던 사진이 난로 위에 세워 있었고 그 사진 속의 조문익님은 여전히 웃는 얼굴이었다. 난 사진의 조문익님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 보고 칠판 한 가운데 사진을 옮겨 놓았다. 그리고 애써 웃으며 말했다.

“조문익 선생! 어디 못 가! 내가 그리 쉽게 보내줄 줄 알아? 천만의 말씀이지!
  분명 말했지! 3월에 여기서 다시 보자고! 그래 3월에 다시 봅시다! 우리 개강하던 날
  조선생 여기 꼭 와야 해! 알겠지? 내 말 듣고 있는거지? 지금!
  내 말 듣고 있으면 알았다고 해! 얼른 알았다고---“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이주여성들도 함께 울었다.
논실에 도착해서 이주 여성들이 조문익님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있는 동안 차가 들어 왔다. 우리는 조문님의 큰 아들 조용화의 뒤를 따라 함께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내가 들샘에서 치루었던 의식을 함께 일하며 함께 살았던 준근 씨가 통곡을 하며 치루고 있었다. 그리고 조문익님의 동생 조상익님이 섹스폰으로 조문익님과 함께 불렀던 운동가를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
  눈부시게 맑은 하늘이 논실 학교 뒤로, 앞으로 푸르게 푸르게 펼쳐 있건마는 한평생 나가자던, 한평생 나가리라 믿었던 사람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몇 사람은 이제 그가 육신의 훨훨 벗어 던지고 좋은 세상으로 갔으니 웃으라고 했다. 춤추라고 했다. 장구를 두드리며 신명나게 한 판 놀아야 한다고 했다. 입가에는 웃음이 눈가에는 눈물이 가득 맺혀 있다. 조문익님의 아내 이현선은 의외로 담담하게 차에서 내리지 않았다. 아득하게 먼 곳을 보듯 차에서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차에서 내리지는 못하겠단다.

  그래도 이현선이다. 저렇게 차에서라도 담담하게 버티고 있는 것은 현선이나 되니까 가능한 일이다. 익산으로 가려던 길을 후배 원산이가 막는다. 이주 여성들을 데려다 주고 논실학교에 좀 남아 있으란다. 이곳으로 올 텐데 아무도 없으면 너무 쓸쓸할 거 같다면서. 현선이도 그걸 바라느냐고 물었더니 그럴 거라고 했다. 그렇다면 더 생각할 거 없다. 지금의 옳고 그름은 현선이가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이다.
  
  이주 여성들을 데려다 주고 다시 돌아 온 학교, 텅 빈 학교, 아무도 없는 학교.
  논실 학교 뒤에서 또 다시 대 숲 소리가 쏴아 -물결치고 있다.
  내 온 가슴을 훑어 내린다.
  사람은 누구나 한 세상 살다 간다. 아름답게 살 일이 아니다. 이토록 남은 이에게 눈 시리도록 가슴 아리는 상처를 주고 갈 일이 아니다. 아니, 아니다. 그래도 아름답게 살 일이다. 그가 떠나며 남기고 간 그리움만큼 그를 추억하는 마음들이 다시 모일 테니까. 모인 사람들의 따뜻한 온기가 위안이 되고 힘이 되어 다시 삶을 가꾸게 하겠지.

  그날 밤은 달도 빛을 잃고 먹구름 사이를 헤매고 있었다. 텅 빈 학교에서 불안한 달을 보며 간절한 마음으로 현선이를 기다렸다. 밤 아홉시가 넘어서야 현선이는 들어 왔고 잠시 눈을 붙이는가 싶더니만 한밤중에 잠이 깨어 말문을 열었다.
  “화장터에서 조그만 봉분에 담긴 남편 조문익을 아들 용화가 들고 나오는 모습을 꿈인가 생시인가 모르게 바라보고 있는데 아들 용화가 내 옆에 와서 말하는거야! ‘엄마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거예요! 그러니 울지 마세요!’ 그 말을 듣고 용화 얼굴을 보면서 퍼뜩 ‘내가 정신을 차려야지. 내가 정신을 차려야겠구나!’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어.”

  용화는 자기도 모르게 이미 조문익님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나이에 그의 어깨에 매달린 짐이 무겁기만 하다. 하지만 자고로 사람은 주어진 자리만큼 크는 법이다. 용화의 삶의 무게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그의 성장 촉진제 구실을 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나는 학교를 나서며 현선이에게 말했다.
  “현선아 이번 주 금요일 날 올게! 2월 17일이 용화 졸업식 맞지?”
  “그래! 편한 대로 해!”
짤막하게 한 마디 하고 현선이는 검정 파카를 입고서 학교 운동장을 가로 질러 건너갔다. 그리고 별집 달집부터 학교 곳곳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학교 세종대왕도 이순신 장군도 늠름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마 운동장 축구대 옆에서 조문익님이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이제는 팔짱끼며 여유롭게 서서.
언제나 이 운동장을 종종 걸음 치거나 뛰어 다니던 그 발걸음을 좀 멈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