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한 혁명가 조문익 ▒▒
 

(펌)고 조문익 열사 -감옥에서 온 편지

2006.03.10 12:32

논실 조회 수:744

고 조문익 열사-감옥에서 온 편지(2)(2004.2.5)  
글쓴이 조창익   2006-02-18 10:42:08, 조회 : 7


부친 것인지 못 부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확인하지 못했지만 여기에 정리해서 올립니다.
                                                                                                                    -조창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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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선배님께

어제는 달력에 고딕글씨로 쓰인 ‘입춘’답게 사뭇 따뜻한 기운이 돌더니 눈발이 날리는 중에도 햇빛이 비쳐 확실히 봄이 다가오기는 다가오는 모양입니다. 어젯밤부터 조용히 내린 눈이 소담스럽게 쌓이긴 했지만 정오가 지나면서부터 다시 햇볕이 따스합니다.

아마도 사람은 자신의 눈앞에 보이는 사물을 통하여 세상을 살피게 되는 것 같습니다. 4.3평 방안에서는 세상일에 대하여 바라보게 되니 어떤 일들에 대해서는 보다 깊이있게 생각하게 됩니다. ‘민주노총’이라는 조직현장운동을 떠나서 ‘운동’을 바라보니 운동을 둘러싼 제반환경들에 대하여 더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움직이는 관계 또는 관계들의 움직임’이라 할 운동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존재들, 특히 우리 인간사회의 각종 움직임들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선배님,
제 생각으로는 우리 운동을 둘러싼 모든 사물들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하고 그것들이 우리 운동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하는데 까지 나아가야 운동이 성숙하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 여기에 왔을 때 제가 거처할 방을 배정받았을 때 가장 어색했던 것이 호칭문제였습니다. 4.3평 조그만 방에 열 다섯 명까지 거처하는데 제방의 경우 상호간에 호칭은 ‘o사장’이었습니다. 방의 주요구성원이 경제사범이다 보니 아마도 이런 호칭을 쓰게 된 것 같은데 다른 방의 경우 ‘00씨’라고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실 둘 다 모두 어색했고 방의 다른 구성원들을 부르는 방법으로 ‘0 선생님’을 사용했습니다. 다른 분들도 저를 부르는데 노조활동을 하다가 왔으니 ‘조 사장’이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였는지 ‘조위원장’이라고 불러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 운동 속에서는 선배, 후배, 선생님, 동지, 위원장 등등 수많은 호칭이 사용되고 있다는 현실이 보였고 몽양 여운형 선생이 생전에 젊은이들을 만나도 ‘절하지 말라, 우리는 모두 평등한 사이 아닌가’라고 하거나 함께 맞절을 하였노라는 옛일이 떠올랐습니다. 시인 김춘수는 ’꽃이라 불러주어야 비로소 꽃이 되는 진실‘에  대하여 얘기했고, 철학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의 호명에 의하여 구조가 재생산되고 주체가 재생산되는 현실자본주의’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상대방에 대한 호칭은 어떤 의미에서는 ’만들어가고자 하는 세상‘에 대한 信託일수도 있다는 섬뜩함도 듭니다. 우리 운동은 주체 들 간의 관계를 어떻게 만들기 위해 어떤 호칭전략을 세우야 할까요. 우리말 특성상 존대어 사용이 불가피하다면 상호존대어를 사용하고 서로 ’동지‘ '선생님’ 등의 호칭을 사용하는 것은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배님,
가족, 여성, 가족제도 등의 문제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운동에서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주제임을 절감하게 됩니다. 지난 1월 20일자 중앙 일보에는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한 과학자의 글이 실렸습니다. 동물행동학을 전공한 최재천 교수는 호주제의 위헌성에 대한 헌법재판에 앞서서 의견서를 제출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인류의 생물학적 진화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중심에 서있으며 한국 남성의 사망률이 높은 것은 호주제와 무관하지 않다’면서 ‘생물학적 족보는 암컷의 혈통만을 기록하며, 부계 혈통주의는 생물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아주 통쾌한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저는 그동안 간간히 여성단체와 여성학자들의 호주제의 비합리성과 반인권성에 대한 의견을 듣고 볼 수 있었지만 최 교수의 眞情的인 주장에 필적한만한 통쾌한 글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 운동 내부에서도 호주제의 악폐에 대해 문제제기는 하지만 스스로가 이를 넘어선 실천을 구성하는 데까지는 미처 나아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운동은 여전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이고 어른 중심(서열, 나이중심)입니다. 호주제가 여성을 억압하고 나아가 아동을 억압하고 궁극적으로는 남성의 인간다움까지 왜곡하는 ‘국가주의적 도구’인 바에야 ‘비국가-민주주의적인 활동가’들 중에서 이러한 구습이 사라져야하며 이러한 고루(固陋)를 없애 나가는 전략적 실천이 하루빨리 자리 잡아야 할 것입니다.

특히 가족의 문제는 요즈음 자본가들도 심사숙고하는 전략적 조건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전경련은 ‘4564세대’를 연구하여 ‘WISE 세대’로 명명하고 ‘잘 통합되고 숙성된 새로운 어른 세대’(Well Integrated New Elder)를 어떻게 시장화 할까 고민하고, 출산률이 세계최저인 1.17로 떨어진 상황에서 2003년 인구증가율마저 30년 만에 최저인 0.32에 이르자 분유 제과산업이 사양화와 여가 문화 등 웰빙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분석합니다. 우리는 어떤 가족을 갖고 있는지 어떤 가족을 원하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본적인 생활영역에 대한 우리 운동의 깊이 있는 고민과 탐구정신이 더 필요한 때가 아닐까요
자본가들의 신문인 <매일경제>의 1.29자 ‘매경포럼’에서 온기은이라는 컬럼니스트는 출산률의 저하에 대해 분석하면서 성장잠재력과 노동력 공급을 걱정하고 있지만 저희의 경우 <국민연금> 개혁방안과 관련하여 출산률 문제를 언급하는 정도입니다.

선배님,
최근 경제동향은 아마도 지난 IMF 위기가 닥쳐왔을 때 민주노총 등 진보진영과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며 사용하기 시작한 ‘고용 없는 성장(Growth without Job)'을 넘어서서 ’고용 까먹는 성장(Jobless Growth)'으로 나아가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전경련 등은 오히려 보다 공세적으로 이데올로기 투쟁을 본격화하고 있습니다. 총자본의 핵심적인 목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만들기임이 분명합니다. 전경련, 대한상의, 경총 등 자본가단체들은 그 동안 전개해온 노조에 대한 공격을 넘어서서 정부는 물론이고 사회제도, 나아가 교육과 국민들에 대한 것으로 발전해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총자본의 주장이 심지어는 초국적자본의 이해를 대변하는 S&P 가 지적하는 한국경제의 문제점과도 초점이 사뭇 다릅니다. 최근 S&P는 한국경제의 걸림돌로 △FTA 등 경제관련 법안이 국회에서 처리되지 않는 다는 등의 정치적 정체(political gridlock)△북핵사태에 따른 불확실성 △내수와 투자부진 △구조개혁의 부진, 특히 사용구조 등 4가지 항목을 지적한바 있습니다.

그런데 오 선배님,
배달호 동지를 결과적으로 타살한 두산그룹의 박용성 회장이 지난 달 28일 초 중등학교 교사들에게 경주에서 행한 강연을 보면 너무나 무시무시합니다. 박 회장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는 바라지도 않으나 최소한 기업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청년실업에 시달리지 않는다”며 교과서에 기업의 목적을 이윤의 사회 환원이라고 기술한 것은 틀렸고 이윤을 많이 내 국가에 기여하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저는 박용성 회장의 그날 강연회가 만약 일회적인 것이었다 해도 무서웠을 터인데 그날 있었던 강연회가 경제 5단체가 합동으로 실시한 것이었고 며칠 뒤인 2월 1일 전경련이 ‘2만 여 명에 시장경제교육’을 한다는 중앙일보 2월 2일자 기사를 읽고 ‘계급적 공포’를 느꼈습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국민에게 시장경제를 가르치는 일에 나선다. 국민의 반기업 정서가 위험수위에 도달했다는 판단에서다. 전경련은 초등학생부터 일반인까지 모두 28,000여명에게 시정경제 원리를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고 1일 밝혔다」(全文)

결국 박 회장의 그 날 강연회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었고 최근 총자본의 문제의식과 자본축적전략의 기본방향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박용성 회장은 다른 지면에서 민주노총의 신임 이수호 위원장의 노선과 민주노조운동에 대해서 언급하였는데 이것도 역시 주목할 만합니다.
「신임 이수호 위원장이 ‘협상후 투쟁’으로 노선변화를 공언… 국제기군에 맞는 노사관계의 룰을 만들자는 것이지 기업에 유리한 노동법을 원하는 게 아니다…우리나라는 11.6%의 조직화된 강성노조가 나머지 88%의 비조직화된 노동자들에게 큰 피해를 주고 있다… 이들 소수는 자기의 기득권을 양보하지 않고 기업인의 희생만을 요구한다.…」(2004.2.2 중앙일보 인터뷰 기사)

오 선배님,
제가 총자본의 움직임에 ‘공포스럽다’라고 까지 표현한 것은 이제 자본가들이 정경유착에 근거한 기형적 재벌체제를 넘어서서 국민들 속에서 ‘기업활동의 정당성’을 획득하려는 이데올로기 투쟁에 힘을 싣겠다는 것 때문입니다. 저는 저의 운동에 깊은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는데 가장 큰 이유는 ‘진보적 이데올로기의 생산 공장’이 점차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주노총은 출범 때 삼십사만에서 지금은 육칠십만으로 두 배 가량 늘었고 민주노동당은 100만명 가까운 지지를 받고 있는데 그게 무슨 이야기냐하는 분도 있겠지만 저는 국민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점차 더 늘어날 젊은 세대의 정치의식이 점점 더 보수화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신자유주의가 발전할수록 비정규직이 늘어갈수록 청년실업자가 늘어날수록 사회구조에 대한 본격적 문제제기가 대중들로부터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민주노총이나 전농의 정당하기 그지없는 투쟁이 고립되고 포위되는 듯한 느낌말입니다. ‘보수화의 대중적 흐름’을 되돌릴 대중운동의 파고가 조직되지 않는다면 민주노총의 약간의 성장, 민주노동당의 약진, 촛불시위의 대중화 등등은 사회진보를 밀고 나가는 ‘구조적 동력’으로 성장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 선배님,
2003년에 민주노총전북본부는 전교조의 학생인권보호투쟁인 NEIS 반대투쟁을 연대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의 학부모로서의 운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노동자학부모운동’을 시작해보자고 결의했었습니다. 그러나 민주노총전북본부가 워낙 번잡하게 일이 많고 정세가 다라주지 않아 결국 제대로 출범식도 치루지 못했습니다. 당시 제 문제의식의 하나는 초중등교육과정에서 ‘노동의 소중함’과 ‘노동원의 권리’에 대한 내용이 뒷받침된 때라야 우리 노동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지지기반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회 운동적-사회변혁적인 노동운동’이 아닌 바에야 노조운동은 노동자들의 경제적 권리를 지키는 무기 이상으로 나아가기 어렵다고 저는 생각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자들이 ‘학부모’로서 ‘교육’을 매개로 사회운동을 전개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노동운동의 과제 가운데 하나라고 저는 생각해왔고 지금도 역시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박용성 회장과 전경련이 이에 ‘교육현장’을 매개로 전쟁을 선포한 이 마당에 우리 운동은 거의 준비가 안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최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서 발표한 ‘기능 인력의 근로조건 및 노동과정실태와 근로생활의 질 향상방안’이라는 조사결과에서 970명의 노동자 중 49.6%가 자신이 중하층에 속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비록 통계가 생산직 노동자들에 한정되긴 했지만 이 조사에서 ‘근속기간이 길수록’ 하층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23.1%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점에 주목합니다. 이 조사결과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비참하게 생각하며 그 비참함을 숙명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봅니다. 얼마나 ‘비참’한 일입니까? 비참한 상황 자체가 비참이 아니라 비참을 숙명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비참이 됩니다. 비참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노동자 자신과 노동자 자녀에 대한 ‘교육’이외에는 없습니다. 노동자 스스로 현실의 질곡에서 행방되기 위한 교육, 노동자 자녀들에게 사회의 모순을 가르쳐주고 극복방안을 찾아주는 변혁의 교육만이 ‘비참’을 넘어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런데 이 ‘교육’ 또는 이데올로기의 영역에 총자본의 손길이 미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람시의 말대로 자본주의가 성숙한 나라에서는 ‘기동전’만으로는 사회운동을 전개하기 어렵고 ‘진지전’이 고려되어야 한다고 말한 그 문제의식을 박용성 등 총자본이 예리하게 간취(看取)한 것이라고 말할 수 도 있을 것입니다.

선배님,
자본가들이 한국자본주의 재생산을 위한 이데올로기의 핵심인 ‘돈이 최고다’ ‘부자되세요’라는 이데올로기적 가치를 경험적인 수준에서가 아니라 전교하고 체계적으로 대중들측에서 구성해내고 이를 통해 군사독재시절처럼 물리적 수준의 지배에서 신자유주의적인 헤게모니지배를 완성한다면 우리 운동은 완전히 새로운 차원에서 사회운동, 노동운동을 전개해야하는 상황에 처할 것입니다.

선배님, 좀 더 멀리 떼어놓고 생각해 볼 거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과 유네스코에 대한 지안(集安)의 세계문화유산지정신청에 의해 불거진 「고구려」문제를 둘러싼 동북 아시아사 논쟁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고구려사논쟁은 신자유주의의 동북아시아판 지배질서를 재구성하는 이데올로기 투쟁입니다. 현재로서는 중국의 ‘민족주의적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인 ‘중화주의(中華主義)’가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하고 남한과 북한이 각각 ‘민족주의적 국가주의’로 이에 수세적으로 대응하는 양상을 띄고 있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좁게는 동북아시아, 넓게는 아시아 지역의 신자유주의적 Bloc 화에 있어서 주도권을 누가 장악하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과 한국(남한 북한)의 갈등은 외형상으로만 핵심일 뿐 오히려 ‘민족주의-국가주의적 발전방향’과 ‘국제주의-비국가주의적 발전방향’의 대립과 갈등이 내포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고구려사’는 본질적으로 ‘중국사’도 아니요 ‘한국사’도 아닌 ‘고구려사’일뿐입니다. ‘고구려’는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연맹체적 국가’였으며 유목적․농경적 특성을 모두 가진 고대동북 아시아의 독립적 중심국가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중국의 북평(北平)지역을 지배한 것이 오늘 날 남․북한의 긍지가 될 수 없으며, 고구려 영토의 2/3가 현재 중국국경 강역 안에 들어있다고 해서 고구려를 승계한 것이 중국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류의 평화와 평등한 연대를 지향하는 국제주의와 민주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고구려사는 동북 아시아 나아가 아시아 더 나아가 지구연방을 구성하기 위한 공동의 역사유산일 뿐입니다. 고구려사를 둘러싸고 은근히 만주지역에 대한 한민족 귀속문제를 임사하고자 하는 발상을 선호하는 자본가들이 실제로 희구하는 것은 대륙간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의 연결에 있어서 남한의 주도권을 강조하는 이데올로기적 수사가 아닐까하고 말한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저는 고구려사 논쟁 같은 우리들의 일상과 거리가 있는 쟁점들도 명백히 운동적 관점에서 바라보아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선배님,
물질의 존재형태가 대개는 고체, 액체, 기체라고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의 경우 고등학교 이전까지 그렇게 배웠습니다. 그런데 최근 발전하고 있는 자연과학은 물질의 존재형식이 고체, 액체, 기체뿐만 아니라 ‘플라즈마’상태도 있다는 것을 밝혀 낸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 아주 최근에 보고된 바에 의하면, -273°C 극저온 상태에서 ‘페르미온응측’이라고 하는 새로운 존재형식이 발견되었다는 겁니다.

이제 물질의 존재형식은 5가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배님, 저는 진정으로 물질의 존재형식이 5가지 뿐 일거라고 믿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 인간의 현재의 지적능력으로 밝혀낸 것이 5가지 일뿐이며 ‘무한한 우주공간의 무한한 물상(物象)’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존재형식으로 다양하게 존재할거라고 믿습니다. 우주와 물질의 무한성에 대한 믿음이 전제된다면 당연히 우리의 지식의 한계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인류는 모름지기 자만하지 않고 활동가는 더욱 탐구하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류가 자신이 존재하는 사회와 지구․우주에 대하여 끊임없이 회의하고 전진하는 노력이 인류의 소임이고 사회운동의 본질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우리 주변을 세심하게 둘러보고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너무 큼직한 주제들만 이야기하다가 정겹고 자잘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놓치는 일은 경계되어야 하겠습니다. 항상 겸손해하며 항상 두려워하며 우리 시대의 동행인(同行人)들과 함께 길을 걸아야 할 시간입니다. 감옥있는 사람에게 ‘시간’은 특히나 가장 소중하게 느껴지는 운동의 동반자입니다. 선배님의 건강과 모든 분들의 행복을 빌며 오늘은 이만 줄입니다.

2004년 2월 5일 오후 平和洞에서  조문익

※PS:이 편지가 평화동에서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될지 아닐지 모르겠지만 일단 보내봅니다. 6일 선고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