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슴이 따뜻한 혁명가 조문익 ▒▒
 

우리동네 이주여성 이야기(5)

2006.03.11 13:24

만복이 조회 수:2298

우리동네 이주여성 이야기(5)
'대화 Dialogue 對話'의 참맛을 알아가며


지난 6월. 민들레 아카데미 가족들
“OK"

휴대폰이 딩동한다. 얼른 들여다보니 달랑 두문자 “OK”라고 씌여있다. 참으로 고마운 두글자! 처음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장수민들레문화교육아카데미를 시작하면서 이주여성들에게 연락을 해야하는데 전화를 50통이나 돌린다든지, 1주일에 편지를 50통이나 보낸다든지 하는 것은 너무나 힘들어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이주여성들 본인이나 남편들의 휴대폰에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한글을 못읽거나 읽어도 이해를 못하는 경우를 생각하여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영어가 되거나 말거나. 의사소통에서 문법은 별로 안중요할 때가 많다고 나는 우겨버리겠다.

"IT'S RAINING ON AND OFF. BUT 민들레아카데미는 OPEN! 꼭 나와요. SUN-PM 2:00”  
“MINDLLE ACADEMY 있어요. 친구와 손잡고 나와요. 05/00/00(SUN) PM 2:00" 들샘

몇주간은 그냥 보내기만 한거다. 그런데, 언제인가 갑자기 “OK" 라는 답신이 오기 시작했다. 영어로 써도 답을 써도 된다고 한 것 때문이었나? 한번 보내고 나면 두서너통의 메시지가 들어왔다.
점점 더 시간이 지나자 그녀들은 문장을 구성하여 메시지를 보내오는 것으로 순식간에 진화하였다. 아직 휴대폰에 남아있는 그녀들의 메시지를 간추려보자.(소문자, 대문자는 그녀들이 보낸 대로 기재하겠습니다)

서툰 문자메세지에서 느끼는 고마움, 정감......'언어 장벽'을 넘어

한 나이 듬직한 이주여성이 보내온 메시지는 “예, 알ㄱ습니다.” 였다. “ㅆ”을 쓰는 것은 한국사람에게도 어렵다. 고백하건데 나는 극히 최근에서야  휴대폰 메시지로 쌍자음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휴대폰 비용을 줄여보려고 ‘정액제’로 바꾸고 난뒤 - 지금은 정액제를 포기했지만 - 월말에는 별수없이 메시지에 의존하게 되었던 몇 달전 두달동안 쌍자음을 안쓰고는 대화가 안되는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배운 결과다. 나중에 이 분은 “예 알개씁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내온다. 진보가 눈앞에 보인다.
  
이제 막 어린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는 아주 젊은 이주여성이 보내온 메시지는 “I'm very sorry tomorrow I can't attend because my baby sick”이었다. 나는 “YOU'RE WELLCOME. 아기가 더 소중해요. SEE YOU AGAIN, NEXT WEEK"이라고 답신을 보냈다. 실제로 고마움을 많이 느꼈던 메시지였다.

다른 주에는 한분이 “SORRY I CANT ATTEND SNDAY SCH. WE HAVE CHESA”라고 보내왔는데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일까? 했다. SNDAY = 일요일, SCH = 민들레 아카데미, 그런데 “WE HAVE CHESA”는 뭐지? 아하~ “제사”다. “제사!” 집안에 제사가 있는 모양이구나. 다음주에 그녀가 나왔을 때 “제사 잘 지냈어요? 고생많았죠?” 하자 방긋 그녀가 고맙다는 표정으로 웃어주었다. 하하. 이 독해력!

더 대단한 것도 있었다. 발랄한 한 이주여성은 꼭 나오라는 메시지에 응답하기를 “ARASOYO”하고 적어 보냈다. 진행팀들에게 이 메시지를 보내주면서 우리모두 ‘뒤벼’졌다. 이 이주여성은 “GOOD MORNING TEACHER”라는 인사를 하기도 했다. 한글 쓰기가 아직 어려운 거다. 충분하다. 넘치고 넘치고 또 넘친다.

지난 추석 즈음에는 추석을 잘 보내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선생님들도 건강하고 행복한 ‘주속’을 되어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단정한 메시지가 들어왔다. 참 아름다운 메시지다. 고생 많이하는 이주여성인데....... ‘추석’을 ‘주속’이라고 쓰기는 했지만 그 전체 문장을 구성하는데 얼마나 어려웠을까?

이 이주여성은 얼마전에 꼭 일요일 교육에 참석하라는 메시지에 “YES I DO”라고 답을 보내와서 “THANKS, REALLY"라고 다시 답을 보냈더니 “OHHH...ꁡ I REALLY APPRECIATE IT! THANKS”라고 보내왔다. 아마도 답을 보내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고 제대로 된 영어도 아니지만 답을 보내왔다는 것 자체가 그녀에게는 감격적이었던 거다. 그동안은 부끄러워 눈인사도 제대로 못했는데.....  

농촌-빈곤-교육과 문화적 소외”,  “이주 + 여성” 문제의식...

요즈음 이주여성들 집을 찾아가고 있다. 여성가족부에서 도움을 받아 진행하는 이 사업은 우리들이 지난 6, 7개월동안 이주여성들을 만나면서 꼭 필요하다고 느끼던 바로 그 사업이다. 오랫동안 우리는 “이주여성들만 만나면 안된다. 가족들 - 아이들, 시부모, 남편, 그리고 이웃들 - 을 모두 만나야하고 그들이 모두 함께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 농촌-빈곤-교육과 문화적 소외”라는 기본적인 어려움에 “이주 + 여성”이라는 어려움이 더해진 것이니 그녀들의 고통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지만 동시에 남편을 비롯한 가족들의 어려움이 함께 해결되어야 진정한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다.“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여하튼 우리는 집에 방문하면서 다른 메시지도 받게되었다. “pls come tomorrow thank you(이주여성 이름)”이라는 메시지를... 오늘 오지말라는 거지? 알았다. 다시 찾아가지 뭐.

한편으로는 우리는 고민중이다. 언어문제에 봉착해있다.

한국에서 이주여성과 만날 때 기본언어는 영어가 아니다. 당연히 한국어이다. 한국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가용성이 높은 언어는 한국어니까. 그런데 그 다음은? 영어?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아니다. 영어를 다음 언어로 배치하면 영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주여성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가령 필리핀 여성들은 대부분 영어를 하니 그렇다치더라도 베트남이나 몽골에서 오신 여성들은 어찌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두 번째 서열의 언어는 실제로 그렇든 그렇지 않든 이주여성들의 다양한 아시아 모국어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중언어교육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필리핀의 경우도 타갈로그어가 기본언어가 되어야한다. 베트남어, 몽골어, 인도네시아어, 인도어, 우주벡어.... 모두 소중한 언어들이다.

그 다음이 영어다. 영어는 한국어와 이주여성들의 모국어를 연결하는 매개어 - 매개어? 이런 학술용어는 아마도 없겠지만 그냥 두 언어를 상호이해시키는 언어라는 뜻으로 사용했다 - 적 지위를 갖는다. 찾아가는 민들레를 적극 기획한 선생님은 이를 “3중언어교육”이라고 개념화하여 말한다.

실제로 집에 찾아가면서 “꾸무스따까? 마간당 하폰?”이라는 인사말이 소중해지기 시작한다. “안녕하세요. 좋은 오후네요” 정도의 타갈로그어가 통해야 영어가 사실 완전히 소화되지 않는 필리핀 이주여성도 숨통이 트일 것 같고, 영어에 대한 부담으로부터도 해방될 것 같다.

어라, 너무 길어졌나? 그만 정리해가야겠다.

모름지기 언어란, 특히 문자란 사람들 사이의 정의(情意)와 속내를 드러내고 사람과 사람을 소통시키고 연대시키는 매개도구였다. 지난 6개월동안의 휴대폰 메시지의 변천사를 되새겨보면서 나는 참으로 대화의 힘을 느낀다.

대화는 단순히 생각을 소통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믿음을 확인시켜주고 서로를 다독거려주며 좀더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끔 밀어주는 힘을 갖고 있다. 단 몇줄, 불과 한통에 25원에 불과한 메세지이지만 거기에는 불멸의 신뢰가 살아있다.
민들레꽃은 옹기종기 모여있을 때 더욱 아릅답고 민들레 홀씨들은 세상 어디든 날아가 다시 꽃을 피운다. 우리의 사랑은 끝이 없고 민들레 꽃은 영원하다.  

장수민들레문화교육아카데미에 참여하고 있는 네미아가 최근에 쓴 글을 말미에 실으며 오늘 글을 맺는다. 네미아가 쓴 글에서 우리는 자신감과 사람들에 대한 믿음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네미아가 영어로 쓴글을 김근오선생님이 번역해주셨다.


외국사람인 내가 장수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네미아(장수군 계남면 신전리 양신마을)

우리는 누구나가 지구에서 살아가는 동안 결코 잊지 못할, 길이 간직될, 소중한 삶들을 누리고 있다. 본래 필리핀에서 태어났지만 지구 위의 땅 한국이라는 곳에 살게 된 나는 내 아이들이나 아이들 세대에게 과거 혹은 현재의 이야기로 기억될, 때론 우습고 때론 슬픈 어려움들과 때론 설명하기 힘든 상황들을 겪게 되었다.

내가 겪었던 일 중 가장 우스운 것은 문법과 발음이 엉터리인 대화였다. 우리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대번 웃는다. 한번은 남편이 ‘물 좀 줘(give me a cup of water)'라고 했는데 나는 물 대신 공(ball)을 갖다 줬다. (물(mull)을 볼(ball)로 알아들은 것이다)

예전에 나는 (아주 매운) 음식에 관한 말, 생활방식, 그리고 문화적 차이 등에 대해서 어려움을 느꼈다. 단순한 말도 알아듣기 전이었기에 모든 것들이 적응하기가 꽤 힘들었다. 게다가 말하고 싶은 걸 표현할 수도 원하는 걸 설명할 수도 없었다. 한두번은 혼자서 집에 돌아가는데 (우리 집이 있는 계남으로 안가고) 장계로 가거나 산서로 가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언제는 장수 버스를 타야하는데 무주 버스를 타서 무주로 가기도 했다.

한편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많은 적응과 훈련이 필요한데 삶이 피곤해지기도 한다. 비록 그렇더라도 난 감사한다. 많은 것을 배우게 되어 지금은 실제 생활에 적응하였기 때문이다.

TV 시청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 그리고 자기 학습 등으로 한국어를 배운다는 건 무척 재미있다. 현재는 정부 지원 프로그램으로 벌써 한국어 쓰기와 읽기 등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그중에서 <장수민들레문화교육아카데미>는 한국어에 대해 더 깊이 가르치고 아울러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일러 줌으로써 큰 도움을 주고 있다. 한국인인 이 분들이 필리핀이나 다른나라 사람들에게 주는 모든 도움에 감사하며 우리의 한국어를 다듬어주고, 한국어 지식을 넓혀 주는 것 외에 한국에서 (아시아지역의) 다른 문화와 결합하여 진정한 한국국민이 될 수 있도록 도움주고 있는데 대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사실 우리부부는 참 잘도 싸우는 커플이지만, 그래도 난 모든 것에 도전하고 싶다,  부부싸움은 글쎄, 사랑을 확인하고, 실수를 발견하고 사고방식을 넓히는 삶의 자연스런 방식이라고 생각한다.신께서는 내게 이쁜 딸 은미를 선사하셨다. 그애 나이는 4살, 남편 전처로부터의 아들이 둘, 이렇게 우리는 함께 살고 있다. 한국에서 5년여 어렵고 힘든 시간이 지나 인고의 눈물이 축복으로 바뀌는 것일까, 이제 마침내 난 좋은 일을 가지게 되었다.(네미아는 최근 장수 및 전주의 몇몇 초등학교 방과후교실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역자)

언제나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감사드리며

원문

My Life

Everyone of us have an unforgettable, memorable and precious life, as long as we live in this creation earth. Lived here in this country Korea, I had a funny, sad, difficulties and unexplainable situation that to my children and my children generation. it could be a past and present story to remember.

The funniest things that I've done is that, talking in grammatically wrong and incorrect pronunciation. People who could hear our language, they are laughing. One time my husband said "give me a cup of water" instead, I gave a ball.('mull' I heard ball)

Before, I found difficulties because of the food(very hot) language, life style, and cultural differences. Before simple language we understand only, that's why it was very difficult to adopt everything, and besides I couldn't express what I want to say and I couldn't explain what I want to do.

One time when I went home alone, instead ,i went to Jang-gye, I went to San-seo, and other times I rode the Jangsu bus, but I rode in Muju bus, so I arrived in Muju.
well, living together with mother-in-law is very difficult. There are a lot of adjustment, training and it could felt tired of life. But despite of that, I thanks a lot, because I learned everything and at present I applied in real life.

Learning Korean language is very interesting through watching television, talking with other people, and studying alone. At present we already study Korean writing, reading, etc. and that programmed sponsored by the government. and most of all the Jangsu Mindlle Culture Education Academy, have their great helping hand to expand their program education about learning more about Korean language, reading and also to study Korean cultures.

All the help given through the Filipino people, genuinely thanks and we extend our hearthfelt thanks for joining this group to evaluate and to expand our knowledge not only in Korean language, but also into a true people, joining into one culture and in one country.

Actually we are the best fighter couple, but I challenge everything. well couple fighting is a natural way of living to show the love, to find the mistake and to expand our way of thinking.

well, god gifted me a one beautiful daughter named Choieunmi and she's 4 years old. We are living together with 2 sons of my husbands on his first wife.
for more than five years of difficulties here in Korea, the joy of tears, is a great blessing and now, finally I have a good job.

May god bless you always. thank you.

Nemia
Nov. 20. 2005
*글 : 네미아 님 / 번역 : 장수민들레문화교육아카데미 김근오 선생님




-조문익(전북인터넷대안신문 참소리 운영위원)





2005-11-30 11:06:59   조문익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