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소리] 존경하는 O선배님께 (4)-교도소에서 보내는 네 번째 편지2006.03.11 13:46 존경하는 O선배님께 (4) 교도소에서 보내는 네 번째 편지 2004-01-20 <편집자 주> 필자는 민주노총 전북본부 전 사무처장으로 지난 해 노동열사투쟁과 노동사무소 시위 건의 책임을 지고 이창석 조직부장과 함께 자진출두해, 현재 전주 교도소에 구금되어 5년을 구형받고, 재판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본지에 '존경하는 O선배님께'라는 제목으로 세 번의 편지글을 보낸 바 있는 필자가 교도소에서 손으로 쓴 네 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O 선배님께 사람이 마음을 기울여 돌아보면 신비롭지 않은 일들이 있겠습니까만 時間(시간)은 참으로 신비롭기만 합니다. 간간히 눈녹은 웅덩이들이 얼음으로 변해있는 조그마한 운동장에 나가 본 오전 운동시간에 높은 담장 사이로 보이는 하늘 한귀퉁이 만큼의 겨울을 맞이하였습니다. 순식간에 지나쳐버린 봄, 여름, 가을... 지금은 겨울입니다. 먹먹하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온 겨울. 미결수의 밤은 스산합니다. 아마도 티그리스 강가에 砲煙(포연)이 가득할 때 선배님께 편지했었으니 창으로 그새 비바람들은 우리가 딛고선 山河(산하)를 얼마나 흔들고 적시었을지...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時間(시간)만큼 뜨거운 鎔鑛爐(용광로)가 있을까요. 수많은 사람들과 사람들 사이에서 벌어진 수많은 일들을 빈틈없이 차곡차곡 쟁여놓고 다 녹여내는 것 같습니다. 뜨거운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광맥처럼 빛나는 소소한 眞實(진실)들을 찾아내게 됩니다. 왜 그때 그리하지 않았는지, 왜 그렇게밖에 하지 못했는지 사람들과 일들은 자신의 內面(내면)을 보게됩니다. 특별히 오늘 밤은 너무나 뜨겁게 눈보라가 몰아치는군요. 이렇듯 용맹한 눈보라 속에서는 지난 歲月(세월)동안 녹여낸 마음의 광맥들을 들여다 보기가 쉬워집니다. 지난 한해동안 아쉽고 안타까운 일들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최선을 다한답시고 걸어온 10년 세월이 허망하게 무너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얼마나 허술했으면, 미처 살리지 못한 틈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배달호, 김주익, 이해남 같은 강철같은 활동가들이 자결해야만 했을까. 그들 노동해방 열사들을 죽음으로 내몬 '힘'은 신자유주의와 초국적자본과 독점자본과 DJ·노정권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들 자신임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의 無能力(무능력)과 무관심과 불감증, 그리고 나태가 그들에게 죽음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모든 노동자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내몰 것이 분명한 근로기준법 개악안이 국회에서 통과되었을 때 조차도 민주노총은 민중운동 단체들은 제대로 된 항의조차 조직하기 어려웠습니다. 결국 구조조정과 실업과 카드빚에 밀려 죽음을 택했던 하루 36명의 자살행렬에, 지난 5년간 '투쟁을 희망삼아 노조를 의지삼아' 살아오던 노조원들, 조직된 노동자들이 더해졌습니다. 김주익 열사가 목을 매고 뒤를 이어 수많은 노동자들이 분신하고 투신하였습니다. '분노와 슬픔'이 상반기 투쟁에서의 '무기력'을 대신한 저희들의 느낌표 였습니다. 선배님. 그때 저는 마음이 얼마나 조급해졌는지 모릅니다. 노동해방열사들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아야겠다는 정당한 강박증이 저를 휘감았습니다.... 그로부터 세달여가 지났습니다. 아이들도 태어나 세달여가 지나면 어엿한 사람대접을 받는 '백일'이 되듯이 이제 저의 그 강박증도 자못 성숙하여 그 무엇이 되어가고 있을까요. ▲교도소에서 손을 적어 보낸 7장의 빼곡한 편지. 다시 한번 돌이켜보면, 그야말로 미소하기 짝이 없는 지구라는 작은 별에서 근근히 깃들여사는 불과 몇만년도 안되는 역사를 가진 인류가 만들어 낸 현대자본주의의 한반도 남쪽 최근 판본은 사람들에게 不幸(불행)덩어리 그 자체라는 것을 알기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김진숙 동지가 처절하게 읽어내려간 애도사에서 얘기한 것처럼 우리들에게 '그 아이들에게는 다른 세상을' 가져다 줄 의무가 있고, 그 긍지를 자각하는 것은 참으로 소중한 인간다움의 첫걸음일 겁니다. 믿음직스럽고 든든한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은 <새로운 세기와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좀 길긴 하지만 참 마음에 깊이 와 닿아서 인용해 봅니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고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완벽한 유토피아를 꿈꾸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공산주의를 비롯해서 대의를 주장하는 모든 이데올로기가 갖는 최악의 단점은, 너무나 고결해서 자신만이 아니라 타인의 희생까지도 정당하게 여기는데 있다는 자유주의 사상가들의 지적은 옳습니다. 또한 세상에 대해서 절제된 기대감을 갖는 사람만이 끔찍한 해악을 자신과 타인에게 강요하는 어리석음을 피할 수 있다는 지적도 옳습니다. 그러나 저는 원대한 희망과 절/대/적/인 열망이 없다면 인간의 본래의 구실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습니다. 비록 그런 시도가 실패했더라도 말입니다" ('대화' 끌리오. 203~204) 선배님. 저는 지난해 10月, 아직은 이 세상이 무엇인지 명확히 모르지만, 혼란스럽게 맞이하였지만 그러나 분명히 새로운 세상에 접어든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저에게 지난 20여년의 운동의 시간들은 부산역 앞에서 쭈그리고 앉아 김진숙 동지의 조사를 들으며 흘린 눈물들이 깃발 펄럭이는 바닷바람에 흩날릴 때 이미 사라졌습니다. 제 주머니와 머리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몸이 세상에 익숙해지는 새로운 시간들이 얼마간 걸리겠지만 백일이 지나고 돌이 지나면 또렷한 새 눈망울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발가락들로 세상을 딛고, 새로운 손가락으로 세상을 부여잡는 그런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어떻게 온 한반도를 떠돌며 아우성치는 민중들의 고통에 함께 할 수 있겠습니까? 영혼과 습관과 운동들이 하나가 되는 것이 얼마나 절절하게 필요한가 하는 것을 몸의 不自由(부자유)에 반하여 무한히 자유로와지는 저의 마음이 알아갑니다. 선배님. 노동자에게나, 농민들에게나, 부안 주민들에게나, 또는 시민들이나, 이라크 민중들에게나 신자유주의의 공기들은 온지구를 不自由(부자유)하게 하고 不安(불안)케 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도시의 공기는 만인을 자유롭게 했지만 현대자본주의에서 지구상 그 어느 곳도 진정한 平和(평화)는 없습니다.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生命(생명)에 대한 존중과 平和(평화)에 대한 열정이 솟아오르지 않는다면, 그런 영혼의 힘으로 새롭게 조직된 사회운동이 아니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부터 얻어지는 행복은 없고 공허하게 미래에 기대는 행복이라는 구호만이 남게 될 겁니다. 보다 밑바닥으로, 보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고 들어가려는 차분한 熱情(열정)이 절실하겠지요. 印度(인도)의 비노바 바베는 하나님의 계시가 이루어지는 세가지 방법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세가지 방법으로 계시한다. 평범한 인간들 안에 계시하고, 자연의 거대함 속에 계시하고 마음 가운데 있는 영혼에 계시한다. 이 세가지가 합쳐져서 至尊者(지존자)에 대한 완벽한 계시를 이루는 것이다" ("비노바 바베' 실천문학사 469~407p.) 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로 가야 합니다. 나 자신을 낮추어 가장 힘든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마음을 비우고 진실해져야 합니다. 영혼에 기대지 않고 진실할 수 없으며 진실없이 당당해질 수 없습니다.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또 되새겨야 합니다. 허나 아직은 충분하지 못한 저를 봅니다. 세상속의 조급증에, 성과에, 세속적인 성취나 권력에 여전히 연연해 하는 저를 봅니다. 아직은 어리기만 합니다. 그러나 선배님. 이것만은 믿어주십시오. 지금 제가 어린 것은 이전의 어리석음과는 다를 것입니다. 마음도 생활습관도 세상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잘 살아가겠습니다.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수많은 스승님들을 봅니다. 문정현 신부님, 문규현 신부님, 그리고 오 선배님. 모두가 저의 영혼의 스승님들입니다.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서야 너무나 좋은 스승들을 모신 감격을 알게 됩니다. 선배님. 모두들 건강하신거죠. 여기 올 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들어와서 송구합니다. 나가면 제대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할텐데... 선배님. 오늘은 이만 줄이겠습니다. 모두들 건강하시길 바라면서 설날 따뜻하게 잘 보내시기를.... 찾아 뵙고 歲拜(세배)하는 대신 편지로 대신합니다. 謹賀新年(근하신년)! 모든 분을 사랑합니다. 2003년 1월 12일 밤부터 14일까지 平和洞(평화동)에서 조문익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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