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동네 이주여성 이야기(4)2006.03.11 13:23 우리동네 이주여성 이야기(4) 국제평화가족들과 함께 한 가야여행 인도에서 온 가야 왕비 허황옥과 가야의 첫번째 왕 김수로. 10월 20일,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야여행이다. 한 달여 동안 모두가 이날을 기다려왔다. 가을소풍은 아니지만 가족들이 모두 모여 하루쯤 푹 놀고 올 날이 많지않은 민들레 가족들로서는 많이 기다려지는 날이었다. 무려 100여 명이 신청했다. 진행팀 빼고나면 70명 밖에 못 태우는데... 걱정이 많았다. 그렇지만 워낙 바쁜 철이니 신청은 했어도 몇 집은 못오겠지하고 안이하게(?) 버텼다. 아침 으스름 안개를 헤치고 장계와 산서에서 각각 출발한 차량이 도착하고 참가자 현원이 나왔다. 모두 28가족이 참여했다. 버스 두 대를 가득메웠다. 로스멜리아와 남편은 뒤늦게 합류했다. 동네를 나오던중 차가 갑자기 멈추어섰단다. 진행팀을 정확히 두팀으로 나누어 탔다. 많은 지역유지들이 배웅을 나왔다. 군수, 의원, 군청 관계자, 정치인등 족히 십여명은 넘을 듯한 사람들이 국제결혼 가족의 가을소풍을 배웅하기 위해 나왔다. 덕분에 약간 출발이 늦어지기는 했지만 로스멜리아가족들이 버스에 늦게오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으니 다행이지 뭐. 계속 관심 가져주면 얼마나 좋을까? 일찍 좀 관심 가져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오늘 가야여행의 핵심 주제는 “이주여성과 한국인 남성의 아름다운 첫만남 - 가야를 찾아서”이다. 알다시피 가야는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중 하나이다. <삼국유사>라는 옛날 역사기록에 의하면 가야는 AD42년 낙동강 유역을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 남부의 주민들에 의해 김수로가 왕으로 추대되어 만들어진 나라이다. 그 후 가야는 AD 562년에 현재의 경상북도 고령에 수도를 두었던 것으로 알려진 대가야가 멸망할 때까지 약 500여년간 12개정도의 작은 국가들의 연맹체로 존재했다. 마치 고대 그리이스의 연맹체와 유사하다. 우리 민들레아카데미가 가야에 관심을 가진 것은 첫 째로는 장수가 후기 대가야에 속해있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둘 째는 가야의 유적지가 장수에서 하루 코스로 적당하기 때문이었다. 셋째는 가야가 이주여성과 국제결혼 가족들에게 긍정적 정체성과 자부심을 부여하는데 좋은 몇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는 점때문이었다. 그 내용은 이 후 역사문화기행의 주해설자였던 김성식선생과 조은산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자. 그럼 본격적으로 가야여행을 떠나보자.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저자 유홍준 선생은 “한반도와 만주지역에서 성장했던 고대국가들은 각각 발전과정에서 제각기 다른 고전적 기풍을 낳았다. 고구려는 강인함, 백제는 우아함, 신라는 화려함에 기초했다고 할 수 있다. 가야가 지향한 미적 세계는 아마도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전아(典雅)함이 아니었을까한다”고 설명한다. 가야는 우리에게 어떤 흥취를 줄까? 장수를 떠나 장수IC로 접어들었다. 옛날 19번 국도를 이용하는 것보다 대전-진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88고속도로로 가는 것이 더 빠르단다. 고속도로에 접어들어 자기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모두가 어색하다. 특히, 민들레 아카데미 식구들이 아닌 할마니, 아저씨들은 더 그렇다. 일어나서 자기 인사를 하라는데 고개를 들고 제대로 일어나서 소개하는 경우가 드물다. 88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 소개가 끝나고 이번 가야여행 - 정식 명칭은 가야역사문화기행이지만 민들레아카데미에서는 Gaya Trip이라고 우겼다. 나중에 이주여성들에게 들은 말인데 남편들이 '가야가 뭐지? 백제는 아니고....신라를 말하는 건가?" 하면서 가야에 대해 정확히 잘 모르더라는 것이다 - 의 의미에 대해 강사들이 해설을 시작한다. 가족들이 많으니 고령대가야박물관과 해인사에 들러서 따라다니며 해설을 할만한 상황이 못된다. 그러니, 찻 속에서 모두 소화하는게 좋다. 이주여성 허황옥과 한국남성 김수로 왕의 아름다운 관계 조은산선생(장수민들레문화교육아카데미)이 우긴다. “가야는 신비로움과 매력이 많은 나라다. 가야의 첫 번째 왕이었던 김수로는 당시 각 부족을 이끌고 있던 아홉명의 간(Khan, 干)에 의해 회의를 통해 추대됐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력이 아니라 민주적인 토론을 통해 대표자를 선출하는 민주주의의 원형을 볼 수 있다. 또, 가야는 12개정도의 국가로 구성된 연맹을 구성하여 오늘날의 연방제 국가처럼 활동했다. 이는 자립과 자치를 중시하는 것으로 오늘날 정치의 핵심적인 철학이 이미 실현되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민주주의와 자치의 철학이 빛나니 이것이 첫 번째 미덕이다." 가야의 첫 번째 왕이었던 김수로는 AD 42년에 왕이 됐으나 결혼을 하라고 요구가 많았는데도 결혼을 하지 않고 기다린다. 그때 그는 '하늘이 결혼할 상대를 보낼 것이다. 나는 기다리겠다’ 라고 말한다. 결국 그는 AD 48년 인디아의 아유타이아왕국 - 인도 갠지스강 유역에 있었던 왕국, 일부에서는 태국이나 중국에 거주하던 아유타이아 이주민일 것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 에서 온 허황옥을 만난다. 고대 인디아의 드라비다인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허황옥은 김수로와 결혼하기 위해 가야에 왔다고 말한다. 결국 두사람은 결혼한다.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고, 허황옥이 타고온 배에 실렸던 파사석탑(불탑)과 차의 씨앗은 매우 소중하게 받아들여진다. 파사석탑과 차는 이주민들이 가지고 들어온 새로운 문명을 상징하여 이것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이주여성 허황옥과 김수로의 결혼과 함께 가야의 문화가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가야인들은 멸망을 전후하여 일본으로 이주해가서 다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간다. 진취성과 개방성이야말로 가야의 두 번째 미덕이다.“ 거창과 가조를 지나 해인사를 지날 무렵 아마도 가야인들의 철기문명의 요람이었을 “야로면(冶爐面)”을 지날즈음 창 밖을 보라면서 다시 이어간다. “한반도에서 철이 생산되기 시작한 시기는 대략 BC 4, 5세기경이다. 그중에서도 가야는 철을 생산, 가공하는 능력, 즉 제련기술이 매우 뛰어났다. 철강으로 강성해진 국가들의 두가지 공통점은 철로 만든 무기와 농기구가 동시에 발전한다는 것이다. 청동보다 강한 철은 농기구로 사용돼 농산물의 대량생산이 가능했고, 철제무기로 무장된 군대가 등장한다. 우리나라에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던 것은 철이 생산되었기 때문이고 양산, 동래, 마산, 진해, 고령등지에서 만들어진 철제무기와 갑옷은 가야가 600여년동안이나 나라를 유지하는 힘이었다. 또한 가야는 생산한 철을 중국이나 일본, 한반도에 신속하게 공급하는 과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선박의 제조와 항해에도 매우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이 모두가 새로운 생산력의 담지자로서 가야가 가졌던 세 번째 미덕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런 힘있는 가야가 무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데 힘쓰기보다는 다른 국제관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는데 있다. 이제 우리가 곧 도착할 고령 지산동고분군에는 현재 일본 땅인 오키나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야광조개 국자가 보인다. 김해에는 중국의 고대 화폐도 보인다. 가야가 낙동강을 신라에게 빼앗기고 난뒤 섬진강을 통해서 국제무역을 전개하려했던 노력들이 유물로 확인된다. 이것은 무력을 통한 지배에 의지하기보다는 주로 평화적인 무역을 통해서 나라를 발전시키려했던 가야인들의 네 번째 평화와 연대의 국제관계를 지키려는 미덕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대목이다. 사실 이 미덕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민들레아카데미에서 가야여행을 통해 가족들과 함께 공유하려한 가치관이었다. 마지막 미덕으로 빼놓았지만 이 말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미리 자료집을 읽어본 아줌마들의 눈빛이 반짝거림을 느낀다. 영어와 일어로 자료집을 번역해놓았으니 미리 읽어볼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수로와 결혼한 허황옥은 모두 9명의 아이를 낳았는데, 김수로는 이들중 둘째에게 허황옥의 성인 허씨 성을 줍니다. 그래서 오늘날 김해 김씨와 김해 허씨는 모두 김수로와 허황옥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둘째아들에게 허씨 성을 줬다는 것 자체가 김수로와 가야인들이 여성을 매우 존중했다는 것을 알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물론 허황옥도 김수로를 매우 존중하여 평생을 함께 했으니 서로가 존중하는 사이였겠죠.” 남편이 일이 바빠서 혼자서 올 수밖에 없었던 제니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차분한 로세마리도 내용을 다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다. 로세마리는 시어머니, 남편, 딸 수민이가 모두 왔다. 그녀들은 이제 왜 자료집 표지가 허황옥과 김수로의 사진이 실려있는지 이해하는 모양이다. 표지 그림을 가리키며 앞 뒷자리의 이주여성들이 타갈로그어로 무어라고 교신한다. 통역을 맡은 김미연씨는 아이들 뒷치닥거리 하느라 제대로 못들은 이주여성들을 위해 처음부터 끝까지 영문으로 된 부분을 읽기로 한다. 로세마리가 돌아가며 읽자고 한다. 한 명씩 돌아가며 낭랑하게 읽는다. 필리핀식 영어가 억양으로 느껴진다. 그래도 그녀들의 공용어다. 스와릿띠아니는 인도네시아에서 왔는데 다행히 영어가 통한다. 홍콩생활 덕분이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2호버스의 김성식 선생은 "남방계문화와 북방계문화의 접합이 한반도문화를 만든 것이니 자부심을 갖자는 취지의 이야기를 실례를 들어가며 설득력있게 말했다"한다. 평소 성격대로 우황을 떨었을텐데 평가가 너무 잘나오니 이상하다. 여하튼 교재가 있으니 핵심은 같았을 것이라는데 안심이 된다. 남편들이 평등한 부부상에 대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보며 통역담당 임성희(익산노동자의 집 소장)씨는 "장수남자들이 도시사람들과는 달리 참 순진하다고 느껴졌다"고 말한다. 도시지역에서 이주여성들과 결혼한 남편들을 수 없이 지켜본 베테랑이니 정확할 거다. 닭튀김도 먹고, 과일도 먹고, 떡도 먹고, 과자도 먹고 하면서 즐기는 사이 어쨌든 대가야박물관에 도착했다. 모두 모여 사진을 찍고 안으로 들어간다. 여기저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본래는 그러면 안되는데 하면서도 학예사들이 적극적으로 말리지를 않는다. 이주여성과 가족들에 대한 배려다. 고마운 일이다. 지금부터 점심까지는 자유시간! 점심은 도시락이다. 영수증 처리 때문에 도시락을 써야한다는 문화원 이야기에 별수 없었지만 속으로는 좀 아쉽다. 좀 따뜻한 밥을 먹였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점심시간에 약간만 풀어놓은 맥주에 남편들은 반색한다. 나중에는 "약간 모자란다"고 말한다. 웃으면서 더이상은 안된다고 했다. 다음코스가 가야산 해인사여서 거기 여행 끝나고 나면 함께하자고 설득했다. 모두가 화통하게 받아들인다. 마음이 서로 열리고 있음을 느낀다. 해인사는 가을 오후 날씨에 고즈넉하다. 곳곳에 단풍 빛이 가득하다. 여기저기 가족들끼리 사진도 찍고 담소를 나누며 올라간다. 우리가 해인사에서 기대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팔만대장경의 위엄과 고도의 불력을 느끼는게 아니라 가족들이, 여성들이, 남편들이 서로 노닥거리며 두 어 시간 산책하는 것. 유모차를 밀고 올라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서로 도와주는 사이에 어느덧 일주문 앞에 섰다. 일주문 들어가기 전에 갑자기 우리 민들레 가족들이 한 쪽으로 몰린다. 분수대 안에 동전을 던져놓게 만들어져 있다. 너도나도 동전을 던진다. 스리왓띠아니는 던졌나? 아들을 낳아야 더 이쁨 받을거라고 했다는데... 해인사에서 저녁으로 접어드는 햇볕을 느끼면서 내려오는 길은 아직도 한가하다. 뒷정리를 하면서 내려오니 버스 뒤쪽에 아자씨들이 모여 술추렴을 하고 있다. 겨우 마른안주 하나 놓고. “아니 나를 빼놓고 자기들끼리만 나시면 어떡한대. 같이합시다”하고 너스레를 떨며 앉는다. 어서오라 반색하며 한잔씩 권하는데 모두가 종이컵으로 한 컵씩이다. “어이구, 이러다 오늘도 죽는거아냐”하면서도 “어이구 고맙습니다”하면서 들이킨다. 왜? 다시 따라주어야하니까! 기념사진을 함께 찍고 버스에 올라 탈 때 남정네들이 한쪽으로 몰려 든다. 자기네들끼리 어울리고 싶은 거다. 장수IC에서 갈아타잔다. 그러자고 했다. 대신 술시중을 들어야하니 내가 그쪽으로 간다. 진행팀을 재배치했다. 이제 가야산에서 장수까지는 적어도 고속도로를 타는 1시간여동안은 서로 흥겹게 노는 시간이다. 돌아가면서 술도 마시고 노래를 부르자. 그런데, 확실히 남자들이 있으니 이주여성들 노래가 활달하지 않다. 몇 곡 부르다가 그냥 넘긴다. 오히려 술이 약간 올라오기 시작한 남정네들이 나선다. 춤도추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남정네 잔치판이다. 할머니들께 노래를 부탁하니 나온다. 이런 경험이 많지는 않으리라. 남정네들이 진행팀 손을 잡고 한잔씩 권하며 야단이다. 고맙다고, 너무나 고맙다고, 앞으로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이런 기회에 더 열심히 참여하고 싶다고 한다. 그렇다. 이 양반들도 아이들을 사랑한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금 무엇인가해야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면 더 좋아질거다. 해인사를 뒤로 하고 지리산 산자락을 만날 즈음 지는 저녁노을의 끄트머리를 쳐다본다. ‘해인(海印)’이란 본래 바다가 만상을 비춘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일체를 깨달아서 아는 부처의 지혜'를 가리킨단다. 우리는 그런 지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민들레가족들, 모든 이주여성들과 국제결혼 가족들의 사랑은 ‘해인’을 간직하고 은근히 그리고 영원히 빛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늘도 장수에서 새로운 아시아를 꿈꾼다. - 조문익 (장수논실마을 운영위원, 참소리 운영위원) 2005-10-25 06:09:53 조문익 기자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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